165헥타르에 이르는 퐁 뒤 가르 보호 구역은 산책로와 전통 농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술사들도 칭송한 하늘 위의 물길, 퐁 뒤 가르 미리 ‘로마 시대의 수로’라는 설명을 듣고 보여준 사진에는 가르동 Gardon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같기도 하고, 아치로 만든 벽의 단면 같기도 한 건축물이 서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 오해였다. 그 강물은 2000년 전 이 수로가 실어 날랐던 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로는 사진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선은 그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000년 전에도 물길은 터널 속에 숨겨져 있었다. 4일 동안 우리와 동행했던 가이드는 퐁 뒤 가르 Pont du Gard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하면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퐁 뒤 가르예요. 수없이 방문했지만 갈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되죠. 제게 퐁 뒤 가르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천재들이 만든 걸작처럼 느껴지거든요.”
AD 38~52년 사이에 건설된 수로의 높이는 48미터로, 5만 톤의 돌을 사용해 커다란 아치를 3층으로 쌓아 올렸다. 가장 상층부에 터널이 있고, 물이 흐른다. 위제 Uzes의 작은 샘에서 솟아나는 물은 50킬로미터를 달려 님 Nimes까지 도착한다. 이 물이 건너는 수십개의 수로 중 하나가 바로 퐁 뒤 가르다. 당연한 소리지만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위제에서 님까지 거침없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 수로는 1킬로미터당 25센티미터꼴로 완만하게 기울어져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땅을 파기도 하고 다리를 세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르동 강의 하늘에 걸린 물길이 48미터 높이로 정해진 것도 로마 과학의 일부였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수로 중 가장 높다. 다른 수로들이 무너지고 17개가 만신창이로 살아남은 동안에도 별다른 파손 없이 2000년을 버텼던 풍 뒤 가르는 수년 전 발생한 홍수에 현대의 건물들이 쓰러졌을 때도 너끈히 견뎌냈다. 로마의 기술 수준에 경탄한 후대의 장인들은 풍 뒤 가르에 존경을 표했고, 예술가들은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연인들에게는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 가족들에게는 피크닉 장소로 사랑받던 퐁 뒤 가르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00년부터는 퐁 뒤 가르 지역에 전시관과 레스토랑, 영상관, 라이브러리 등을 포함한 편의 시설이 들어서고 로마 시대의 농장을 복원한 산책로가 조성되면서 아이들의 교육이나 가족의 하루 코스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기자의 자격으로 상층부의 터널 내부를 관통해서 걸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수십 센티미터 두께로 쌓인 침전물이 로마인들에게는 터널을 막아버릴 수 있는 골칫거리였지만, 훗날의 과학자들에게는 시대마다의 수질을 밝혀내어 생활상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고고학적 사료가 되어주었다. 500년 동안 청정수를 제공했던 수로는 6세기가 되자 오염되면서 사용이 중단됐다. 이후 이 수로를 다시 사용해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했다. 흐르는 물처럼 터널 속을 걷다가 무너진 틈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강변의 풍경이 또 하나의 예술이다. 1일 입장권은 12유로. 주소 Route du Pont du Gard 30210 Vers-Pont-du-Gard 문의 08 20 903 330, www.pontdugard.fr
1, 2 퐁 뒤 가르에는 로마의 수로 사업을 이해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박물관이 있다. 3 퐁 뒤 가르의 상층부. 가장 위쪽에 물이 흘렀던 터널이 있다. 4 생 기옘 르 데제르로 가는 어귀에 있는 악마의 다리에서 바라본 겔론 계곡의 절경. 5 ‘사막’이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마을에는 항상 물이 풍부하다. 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겔론 수도원.
오아시스에서 전설을 마시다, 생 기옘 르 데제르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에서도 단 몇 줄의 정보가 전부일 정도로 ‘미지’인 곳과의 첫 만남은 가장 개연성 높은 장소인, 관광안내소에서 시작됐다. 생 기옘 르 데제르 Saint Guilhem Le Desert의 지도가 새겨진 청동 표지판 옆, 계단 세 번째 칸에 미셸이 한 손을 짚고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그 첫인상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단호함, 심상치 않은 것 같은 예감, 틀리지 않았다. 생 장 드 포스는 단 하나의 메인 도로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는 12세기에 세워진 교회와 수도원이 하나 서 있는 작은 마을이다. 어림잡아 150미터 정도의 도로이니 대충 20분이면 투어를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250명의 주민 중 한 명이자 관광사무소 직원인 미셸과 함께하면 2시간도, 3시간도 부족하다. 그는 종종, 아니 자주 모퉁이에 걸음을 멈춰가며 샤를마뉴 대제의 전설, 유명한 도보 순례길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와 관련된 성 야고보의 죽음 등을 설명했으며, 로마네스크 교회 양식의 디테일,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생활, 프랑스 혁명의 의의 등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메모리 용량도 부족하지만 CPU의 속도도 따라주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이 투어가 지루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바로 생 기옘 르 데제르다.
7, 8, 9, 10, 11, 12 좁은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은 단 하나의 도로를 중심으로 집들이 길게 배치되어 있다. 250명의 주민은 이웃이 아니라 가족이고, 관광객은 그들 모두의 손님이다.
‘전설이 되어버린 역사’라는 알쏭달쏭한 근거에 따르면, 생 기욤은 샤를마뉴 대제의 열두 기사 중 한 명인 아키텐 Aquitaine의 공작 칼 마르텔의 손자다. 기욤은 사라센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웅이 되었는데 후에 겔론 계곡에 수도원을 짓고 수도자가 되었다. 812년에 숨을 거둔 그는 샤를마뉴 대제에게 받은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True Cross라고 한다)의 조각을 수도원에 기증했다. 이후 기욤 수도원(옛 겔론 수도원)은 중요한 성지순례 장소로 떠올랐다. 생 기욤을 생 자크, 즉 성 야고보와 동일시하며 밀려드는 방문객들을 수용하기 위해 교회와 수도원은 11세기에 증축됐다. 유명한 보도 성지순례 코스인 생 자크 드 콩포스텔 Saint Jacques de Compostelle(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의 일부가 되면서 보호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는 기독교 성지가 될 만한 그 어떤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세월의 힘에 거의 무너져버린 수도원 회랑의 기둥과 조각들은 뿔뿔이 팔려나가서 뉴욕의 회랑 박물관까지 진출해 있다. 이제 와서 전설과 역사의 경계를 따지는 것은 순례자에게나 관광객에게나 별 의미가 없다. 어느 쪽이든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수도원과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만큼은 눈앞의 현실이다. 맑은 계곡물이 넘쳐나는 마을 이름에 왜 데제르 Desert, 즉 사막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을까. 수도사가 된 기욤에게 이 한적한 마을은 세상과 고립될 수 있는 정신적인 사막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연중 관광객과 순례자들로 북적거리는 ‘오아시스’에 가깝다. 문의 04 67 57 44 33, www.saintguilhem-valleeherault.fr
1 밖의 퐁 네프 다리는 카르카손 성채를 조망하기 위한 명당이다. 2, 3 카르카손의 ‘기사 뮤지엄’에는 ‘현대의 기사’ 질 알레산드리 씨가 살고 있다. 4, 5, 7 카르카손은 유럽에 현존하는 요새 도시 중 가장 크다지만 우리나라의 작은 아파트 단지 만 한 규모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가게가 즐비하다.
두 번의 포옹이 남긴 유산, 카르카손 카르카손의 역사 도시 라 시테 La Cite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는 유럽에 현존하는 요새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크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13세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규모는 우리나라의 작은 아파트 단지만 하다. 실제로 이틀쯤 지나자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사람처럼 갑갑증이 생겼다. 50미터 높이의 언덕 위에 이중의 담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의 내부에서 보이는 것은 서 있는 골목과 양쪽의 건물, 그리고 직사각형의 하늘뿐이었다. 52개의 망루에 올라가지 않는 이상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성벽 사이 틈을 찾고 있자니 이 요새의 공고함이 다시 보였다. 2500년 전에 도시가 형성된 카르카손은 서고트와 사라센의 지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 요새인 라 시테를 축조했고, 1226년 이중으로 성벽을 쌓은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분쟁이 종료될 때까지 카르카손은 프랑크 왕국의 남쪽 국경선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였다. 하나의 성벽으로 부족해서 한 겹을 더 둘러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세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해 사람들은 ‘기사 뮤지엄 Musee de La Cheval!erie(www.musee-cheval!erie.com)’을 방문한다. 중세와 사랑에 빠진 질 알레산드리 Gilles Alessandri 씨는 지롱드에 있는 자신의 ‘성’을 팔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현대의 기사’를 자처하는 그에게 역사를 수호하는 일은 큰 소명이다. 화술에 능한 그의 속사포 강의에는 투구와 갑옷, 화살 등을 소품으로 사용하는 아이들과의 즉흥적인 역할극과 검술 강습이 포함된다.
6 재치로 적군을 물리쳤던 마담 카르카손의 이름을 따서 도시를 ‘카르카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카르카손의 기인으로 꼽히는 그는 한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똘망똘망한 아들을 낳았는데, 휴대폰 사진을 보여주며 중세의 역사보다 긴 자랑을 쏟아냈다. 이틀 만에 손을 들어버린 마을에서 일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까. 그들에게 행복이자 불행인 것은 가뜩이나 좁은 거리를 메우는 연간 500만 명의 관광객이다. 30년 전에는 1000명 정도가 사는 평범한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120여 명 정도가 살고 있고 그중에서 토박이는 50여 명에 불과하다. 1125년에 세워진 샤토 콩탈 Chateau Comtal 정문 앞에서 그림엽서나 관광 안내 책자, 그리고 카르카손 특산물을 판매하는 상점(librairie Pennavayre)을 운영하는 페나바이르 할머니는 이곳에서 75년을 살아왔다. 한 때는 도시가 공동화되면서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지만 다시 한 번 카르카손을 껴안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덕분에 지금의 카르카손은 남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중세의 요새 도시로 남게 됐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은 페나바이르 할머니의 후손들이다. 할머니의 손자는 얼마 전 골목 안쪽에 새로운 레스토랑을 오픈했고, 카르카손을 떠나 다음 격전지로 향하는 우리에게 맛있는 카슐레(콩과 돼지고기, 소시지를 뭉근하게 끓여내는 겨울 보양식) 한 그릇을 대접했다. 문의 04 68 102 433, www.carcassonne-touris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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