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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ica 여행/탄자니아

잔지바르의 옛 노예 시장과 성공회 대성당~

 

 

노예 시장이 있던 곳에 세워진 성공회 대성당을 돌아본다.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의 노예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노예무역 금지 협정이 맺어지기도 한 노예 무역 철폐를 위한 상징적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19세기 초 인도양의 프랑스령 섬들은 플랜테이션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그리하여 동아프리카 해안으로부터 노예를 사들여 올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는데

 

1810년 프랑스령 모리셔스 Mauritius가 영국인들에 의해 점령된 후

영국 총독은1817년 이후 더 이상 노예를 수출하지 않는 협약을 마다가스카르 Madagascar의 추장과 처음으로 맺게 되는데

 

이것이 동아프리카에 있어서 노예 무역의 종식을 예고하는 최초의 조치였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노예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쉽사리 포기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약 술탄이 노예 무역을 포기할 경우 술탄에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영국인들로서는 아랍인들과 술탄으로 하여금 노예 무역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이 작성한 노예 무역의 참혹상에 대한 글이

영국으로 하여금 동아프리카에 있어서의 노예 무역을 종식시키는데 있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하였고

 

영국 정부는 바틀 프리어 Bartle Frere 경을 잔지바르로 보내

술탄 세이드 바르가쉬 Seyyid Barghash에게 노예 무역의 완전한 철폐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결국 1873년 6월 5일 바틀 프리어 경과 술탄 바르가쉬 사이에 맺어진 노예 무역 금지 협정 Frere Treaty으로

모든 술탄들의 항구에서 이루어지는 노예 무역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지었지만 육상 노예 무역만은 허용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막대한 이윤 추구의 매력으로 인하여 노예 무역의 완전한 근절은 쉽지 않았고 육상 노예 무역은 허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노예들은 소말리아 Somalia 지역까지 육로로 이동된 뒤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Arabia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897년 잔지바르와 펨바 Pemba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본인이 희망하면 그 어떤 노예도 자유인이 될 수 있게 되었고

 

영국령 동아프리카 케냐 에서는 1907년에, 탕가니카 Tanganyika에서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독일로부터 탕가니카를 획득한 이후 노예 제도를 완전 철폐하였다고 한다.

 

이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본다~

 

 

 

 

 

 

입구에서 바라본 제대 부분 모습이다.

 

 

 

 

 

제대

 

 

 

 

 

여느 서방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제대 주변은

 

많은 성인들의 모습이 프레스코화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제대 상부 천장 모습

 

 

 

에드워드 스티어 대주교  Bishop Edward Steere

 

제대 주변을 돌아보다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됐다.

 

제대 뒤의 바닥에 누군가의 묘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Edward Steere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에드워드 스티어 대주교  Bishop Edward Steere는 1829년에 런던에서 태어나

1882년 8월 27일에 이곳 잔지바르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하는데

 

이 대성당을 건설한 장본인이란다.

 

대성당은1873년에 공사를 시작해 10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고 하고~

 

 

 

 

 

 

제대에서 바라본 입구와 네이브 모습이다.

 

 

 

 

 

 

 

벽변에는 부조로 만들어진 성화들이 걸려 있다.

 

 

 

 

 

 

 

서양 여행자들을 상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현지 가이드들의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이야기에 저리도 열변을 토하는걸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이 교회와 관련된 노예 무역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대성당을 나선다~

 

대성당 앞의 자그마한 뜰에는 하얀 팻말이 세워져 있는데

각기 다른 언어로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노예 시장으로 알려진 이곳을 찾은 많은 여행자들이 보인다.

 

우리는 입구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입구로 나서면서 깔끔하게 단장된 대성당 모습을 다시 담아본다.

 

그리고 입구의 건물로 들어서니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그동안 심심찮게 보아왔던 기념품들이라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는데

 

매장 한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고

그 옆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Slave Chamber~

 

 

 

 

 

 

보기에도 무척 열악한 방에 쇠사슬도 매어져 있는데

가이드가 그 쇠사슬의 용도를 직접 보여준다.

 

노예 시장에서 팔려나가기 전에

노예들을 가두어 놓는 곳이란다.

 

 

 

 

 

 

작게 뚫린 세로창으로 들어오는 것이

 

이곳의 유일한 빛이고 공기다.

 

 

 

 

 

 

방은 두 개가 있다.

 

또 다른 방~

 

 

 

 

 

지하의 방을 빠져나와 노예 무역의 실상을 보여주는

각종 전시물들이 있는 전시장을 둘러본다.

 

아랍인들은 동아프리카 지역의 노예 무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매년 몇 명의 노예를 포획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초기 노예 무역에 있어 거래된 인원은 대략 연간 80,000~100,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노예 무역은 19세기에 가장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인도양에 위치한 프랑스령 섬 모리셔스 레위니옹 세이셸 등의 플랜테이션에서 다량의 노동력이 요구되었고

술탄 세이드 사이드 Seyyid Said는 잔지바르의 수업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예 무역을 촉진 장려시켰다고 하는데

그 방법의 일환으로 인도 상인들을 잔지바르로 불러들여 정착시켰으며 이들은 아랍 노예 무역상들에게 자금을 빌려 주었고

 

이 자금을 활용한 아랍 상인들은 동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노예를 포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잔지바르 여행은 노예 무역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동안 알고 있었던 내용은 지극히 부분적이고 편협된 내용들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노예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은

미국의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이나 뿌리라는 영화를 통해서 알아온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을 여행하면서 노예 제도의 시초도 상당히 오래되었고

그 역사도 무척 길었다는 내용을 알게되어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또한 아랍 상인들이 노예를 획득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는데~

 

첫번째는 아랍 상인 자신들이 간혹 원주민 마을을 급습하는 경우이며

두번째 경우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원주민 종족과 연합하여 타종족을 공략하는 방법도 동원했다고 하고

 

또는 사전에 미리 밀약을 한 종족에게 무기와 실탄을 공급하고

그들로 하여금 타종족을 공격하여 포로를 생포해 오도록 한 후

 

그들로부터 노예를 사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종족도 생기고~

 

노예에 대한 전시물은 상당히 많았고 그 내용도 다양해서

노예 무역이 폐지될 당시까지의 내용을 소상히 볼 수 있었다.

 

 

 

 

 

 

노예 시장을 나와서 거리로 나섰다.

 

노예 시장을 돌아본 후라서 그런지 몰라도

거리의 오래된 낡은 건물들 모습 조차 음산하게 느껴진다.

 

 

 

 

 

 

 

 

 

 

 

 

 

 

대로변의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고

돌고래 투어를 갈 때에도 궁금했던 모습인데

 

이곳은 잔지바르의 시장이 있는 곳이다.

 

 

 

 

 

 

 

 

 

 

 

 

 

 

상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니

 

시장이 가까워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