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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Africa 여행/이집트

선사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약 4천 년에 걸친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이집트 박물관~

 

카이로의 세계적인 고대 이집트 박물관은 프랑스 고고학자인 오귀스트 마리에트 Auguste Mariette (1821~1881)의

 

고대 이집트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마리에트는 1858년 카이로 시내 나일 강변의 불라크에 작은 규모의 이집트 고대 유물 관리국을 창설했는데, 이것이

 

이집트 박물관의 전신이라고 한다. 그의 사후 1890년 나일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이 유물들은 기자에 있는 이집트

 

부왕 관저로 옮겨지고, 이후 마스페로, 모르강 등 프랑스 인들의 유적 발굴에 힘입어 유물이 급증하게 되었고 늘어나는

 

유물들을 별도로 보관, 전시할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해지자, 1902년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현재의 박물관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왕국 제18왕조의 투트메스 3세 두상이다.

 

 

투트메스 3세는 제18왕조의 파라오로서 어린 나이에 파라오가 되었으나 실제로 통치한 것은 그의 숙모인

 

하트셉수트 여왕이 죽은 뒤부터였다고 한다.

 

 

투트메스 3세는 멀리 중동까지 원정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을 세웠으며 고대 이집트의 위대한 파라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중왕국 제12왕조의 아메넴하트 3세의 스핑크스다.

 

 

제21왕조에서 제22왕조 사이 새로운 수도였던 타니스에서 모두 7개의 화강암으로 제작된 아메넴하트 3세의 스핑크스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파라오의 초인간적인 권능을 나타내는 기념물이었는데 특히, 아메넴하트의 스핑크스는 전통적인 파라오의

 

두건을 대체하고 있는 사자의 갈기를 그대로 묘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하면서도 잔혹했던 그의 통치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돌출한 광대뼈, 살집이 느껴지는 두툼한 입술, 코 언저리의 깊은 주름은 파라오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며 강인한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파라오의 신성을 상징하는 긴 수염과 머리 중앙부의 코브라도 파라오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정면에서 본 아메넴하트 3세의 스핑크스 모습이다.

 

 

스핑크스 전체를 받치고 있는 높고 묵직한 받침대의 여러 개의 카르투시에는 아메넴하트 3세의 스핑크스들을

 

가져다 사용했던 다른 파라오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제21왕조의 프수세네스가 이 스핑크스를 타니스로

 

옮겨놓은 장본인이라고 한다.

 

 

 

 

 

 

 

1798년 7월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이 인도로 나아가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400여 척의 배로 3만 6천 명의 이집트

 

원정군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고, 유명한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 군을 섬멸해버린 나폴레옹은 상륙 후

 

3주 만에 카이로에 무혈 입성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29세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군 외에 175명으로 구성된 이집트 학술조사단을 함께 이집트에 데리고 갔는데, 그가 군사 원정에

 

이렇게 많은 학자들을 대동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 때 학자들을 대동했다는 고사를 읽고 모방한 것이라고 한

 

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어 위대한 공적

 

을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로제타 스톤의 발견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조사 결과를 9권의 책과 11권의 두터운 그림판

 

으로 만든 '이집트지 Description of Egypt'의 발간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다음 해인 1799년, 프랑스 원정군의 병사들이 로제타의 교회에 있는 쥬리안 요새를 수리하

 

다가 돌비석 판을 발견했는데, 마법의 기호 같은 글자가 깨알같이 새겨진 검은 현무암의  이 비석 판이 이집트 문명의

 

신비를 푸는 열쇠가 된 유명한 로제타 스톤이라고 한다.

 

 

그런데 1801년,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한 프랑스군은 로제타 스톤을 비롯하여 고대 유물, 조각, 파피루스

 

두루마리, 석관 따위를 전리품으로 모두 영국군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로제타 스톤은 영국군이 영국으로 가져가 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로제타 스톤의 비문은 기원전 196년, 멤피스의 신관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 (B.C. 205~180)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서 전국 신전에 파라오의 석상과 사당을 세운다는 뜻을 결정한 '멤피스 법령'이라고 불리는 선언문이었는데,

 

 

이 석판에 새겨져 있는 히에로글리프를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F.Champollion : 1790~1832)

 

이 해독하는 데 성공한 것은 1822년으로 나폴레옹이 죽고 2년 후였다고 한다.

 

 

 

 

 

 

 

히에로글리프는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는데, 한 글자가 한 가지 소리를 내는 '한 소리 글자', 두 가지 소리를 내는

 

'두 소리 글자', 세 가지 소리를 내는 '세 소리 글자'가 있으며, 히에로글리프는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도 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히에로글리프를 영어 알파벳의 기원으로 보는 이유는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 로마자이며, 그 로마자의 기원인

 

페니키아 문자가 이집트 문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히에로글리프의 땅 로제타에는 로제타 스톤의 발견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고대 유물들이다.

 

 

 

 

 

 

 

중왕국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상이다.

 

 

1900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된 석상인데, 이 석상의 발견은 이집트 발굴사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하워드 카터는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발굴한 사람인데, 하루는 카터가

 

말을 타고 가다 낙마를 했는데 바로 그곳이 지하 묘지로 통하는 입구였다고 하다.

 

입구로 들어가자 묘실이 나왔고 그곳에 아마로 둘러싼 멘투호테프의 거대한 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멘투호테프는 혼란기인 제1중간기를 청산하고 다시 이집트를 통일한 파라오인데, 지하 구조물은 그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고, 이곳에 거의 실물 크기로 제작된 파라오의 석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짧은 흰 망토를 걸치고 머리에는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 관을 쓰고 있는데, 흰 짧은 망토는 왕권의 강대함을

 

위해 1년에 한 번 제 祭를 올릴 때 파라오가 입는 옷이라고 한다.

 

 

각이 진 큰 얼굴, 신과 조상으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았음을 상징하는 긴 턱수염,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껌벅거릴 것 같은 크고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는 위엄과 힘이 느껴진다.

 

 

피부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고인이 된 파라오가 저승을 지배하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었음을

 

일러주고, 파라오가 두 팔을 가슴 위에 모으고 있는 자세도 역시 오시리스의 자세다.

 

 

하지만 하체는 고왕국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집트 석조 좌상의 전통에 따라 간소하게 처리되어 있다.

 

 

 

 

 

 

 

고왕국 제6왕조 초, 스네프루 파라오 (기원전 2323~2551) 시대에 그려졌다는 메이듐의 거위 벽화다.

 

 

스투코, 즉 화장 벽토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대 이집트부터 자주 사용되었던 장식 기법인데, 특히 조각으로 장식하기

 

어려운 부분에는 언제나 화장 벽토를 이용한 벽화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화장 벽토는 잘게 썬 짚과 전토를 섞어 만들었고, 그런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표면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가죽 등으로 문질러 윤기를 냈고 그림에 사용된 염료는 자연에 널려 있는 다양한 재료 속에서 얻었다고 한다.

 

 

황토는 붉은색과 황색을 제공했고 회색 점토는 무채색을 얻는 데 쓰였고, 그 외에 공작석, 터키석 등의 광물을 이용하여

 

물감을 얻었으며, 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염료를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실로 놀라울 정도의 다양한 색을 얻을 수 있었다

 

고 한다.

 

 

제3왕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후니의 피라미드가 있는 메이듐 소재, 네페르마트와 이테트의 무덤 벽을 장식하고 있던 이

 

그림 속의 거위는 정확하게 좌우에 3마리씩 모두 6마리이고 마리 수에서만이 아니라 동작도 대칭을 이루도록 했다.

 

 

또한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거위들의 깃털을 다르게 묘사하는 섬세함도 엿볼 수 있다.

 

 

 

 

 

 

 

32호실의 아름답게 채색된 높이 1m의 헬리오폴리스의 신관 라호텝과 네페르트 부부 좌상이다.

 

 

 

 

 

 

 

검은 돌로 정교하게 조각한 이 파라오 석상은 아름답고 위엄 있는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파라오 머리 뒤에

 

매의 형상을 한 태양신을 조각해 놓았다.

 

 

태양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파라오임을 강조한 형상이다.

 

 

 

 

 

 

 

 

 

 

 

19세기 말인 1893년 사카라 인근에서 출토된 이 서기상은 이집트에서 문자를 통한 기록과 관련된 읽고 쓰는 일의

 

중요성을 일러주고 있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관리하는 관료층은 공공 영역은 물론이고 사적이거나 종교적인 제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든 관료들 중에서도 서기들은 가장 상층에 속해 있었고 가장 많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식자층으로 자연히 서기는 직업 중에서 가장 대접을 받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갈대로 만든 붓과 파피루스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문맹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제작되었는데, 서기 상은 흔히 무릎 위에 파피루스를 펼쳐놓고 한 손에는 붓을 든 채 앉아 있는 좌상으로 제작되곤

 

했다고 한다.

 

 

서기 상에서 유심히 볼 것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긴장된 눈빛과 얼굴 표정인데, 잘못된 기록은

 

의사소통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엄한 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 1층 중앙 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상을 정교하게 돋새김해 놓은 석판들이다.

 

 

 

 

 

 

 

신전 입구를 장식했던 석판을 모아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시켜 놓은 것도 있다.

 

 

 

 

 

 

 

중왕국 제13왕조의 아우이브레 호르의 카 조각상이다.

 

 

죽은 자 곁에는 카의 조각상을 세워두곤 했는데, 파라오의 모습을 한 이 카의 머리 위에는 카를 의미하는

 

들어 올린 두 팔 모양의 상형문자가 올라가 있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카 조각은 대단히 우아한 몸매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깊은 두 눈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경쾌하게 걷고

 

있는 두 다리는 생명을 상징하는 타의 속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박물관 통로에 놓여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스핑크스다.

 

 

 

 

 

 

 

박물관 출구 쪽에 마련된 기념품점 모습이다.

 

 

 

 

 

 

 

 

 

 

 

 

 

 

 

 

 

 

 

이집트 박물관 정원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