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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떠난 Europe 여행/이탈리아

사랑의 결정 단테와 베아트리체

<Henry Holiday, Dante and Beatrice, 1883, Oil on canvas,
55.12 x 78.35 inches / 140 x 199 cm,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England>
 
'정열적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애인의 본질적 모습에서 새로운 장점을 찾아내는 정신적 활동을 의미한다.'는 스탕달의 수정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해 줄 커플이 여기 있다. 바로 단테와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이다. 유럽인들이 삶의 교과서로 여긴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신에 버금가는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로 격상시켰다. 단테는 '신곡'에서 신의 옥좌로 향하는 단테의 길라잡이요, 구원자 역할을 맡는다. 단테가 어떤 결정작용을 통해 베아트리체를 숱한 사람들이 연모하는 연인들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단테의 결정작용 과정을 살펴보자.
 
'데카메론'의 저자요, 단테 연구학자였던 보카치오는 저서 '단테의 삶'에서 연인들의 운명적인 첫만남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5월 초하루 아름다운 꽃들이 화창하게 비어난 피렌체. 명문귀족 폴코 포르티나리 가문은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축제를 베푼다. 피렌체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단테의 부친 알리기기에로도 아들을 데리고 흥겨운 파티에 참석했다. 단테는 이 파티에서 포르티나리의 귀엽고 예쁜 딸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게 된다. 어린 단테의 눈에 비친 베아트리체는 천사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용모와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베아트리체는 파티의 꽃이었다. 단테는 첫눈에 베아트리체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꼈다. 그날 이후 단테에겐 오직 베아트리체를 보는 것만이 생의 유일한 위안이요 행복이 되었다.'
 
단테가 파티에서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넋을 뺏을 만큼 아름다운 소녀와의 첫만남은 소년의 순결한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가장 민감하고 순수한 어린 시절에 단테는 불 같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테는 스무 살 되던 해에 당시의 격정을 자신의 저서 '신생'에서 생생하게 털어놓았다.
 
'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던 생명의 정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요동쳤으며 작은 맥박소리에도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보아라, 신이 오시어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도했도다.... 지복이 여기 나타나셨도다.'
 
단테가 이처럼 성서의 어투를 빌어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감정을 장중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한 덕분에 후세인들은 구원의 여인 베아트리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첫눈에 반한 사랑, 첫만남에 숙명의 여인을 발견한 시인의 적나라한 고백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19세기 영국 화가 헨리 홀레데이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첫만남을 그림으로 옮겼다. 화가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운명적인 첫만남을 유년기가 아닌 성년기로 각색햇다.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베아트리체가 친구와 함께 아르노 강변을 산책한다. 청년 단테는 갈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애타게 바라본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낯선 남자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걷는다. 화면 배경에는 피렌체의 상징이요, 젖줄인 아르노 강이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첫사랑이 불행히도 짝사랑이 되고 만 단테의 슬픔을 말해준다.
 
<Lord Frederick Leighton, Dante in Exile, c.1864, Oil on canvas
60.04 x 100.00 inches / 152.5 x 254 cm, Private collection>
 
19세기 영국 아카데미 스타 화가 로드 라이튼경의 <단테의 추방>을 감상하면서 그의 추방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화가는 이 작품에서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화면 가운데 유령처럼 창백한 표정의 단테가 서 있다. 단테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고 몸 전체에서 깊은 절망감이 풍겨 나온다. 화려하게 치장한 베아트리체가 길을 지나치다 문득 고개를 돌려 단테를 바라본다. 미덕을 지닌 우아한 여신이라는 찬사에 걸맞게 그녀는 눈부신 햇살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단테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눈길조차 줄 수 없다. 연인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고통과 추방형을 선고받은 굴욕감이 바위처럼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화가는 단테의 불행을 강조하고 보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 베아트리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테가 생이별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Dante in Exile [detail: right]>

 

하지만 실제상황은 그림과는 다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 피렌체 시로부터 영구적인 추방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왜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하는 굴욕적인 형을 받게 되었을까? 당시 피렌체는 권력투쟁이 심각했으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귀족들은 일과처럼 반목을 일삼았고 정치는 음모와 계략, 살인으로 얼룩졌다.

 

단테 역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그가 피렌체 행정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이다. 단체가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알현하러 간 사이 그가 소속한 백당이 반대편 흑당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백당은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지하는 일파이며 흑당은 교황 반대파를 말한다. 흑당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후 백당의 지도자인 단테의 집을 습격해 가재도구를 약탈하고 불까지 질렀다. 그리고 궐석 재판을 열어 그에게 세 가지 중형을 선고했다. 선고 내용은 5천 피오리나에 해당되는 벌금 납부, 2년 간의 귀양살이, 공민권 박탈이었다.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된 단테는 이렇게 피렌체에서 영구히 쫓겨나게 된 것이다.

 

<Dante in Exile [detail: left]>


바른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직선적인 성격과 정치적 야합을 경멸하는 결백증은 단테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단테가 유랑생활을 하던 때 피렌체 시는 단테에게 사면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단테가 자신의 죄를 당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굴욕적인 조건부 사면이었다. 명예를 손상받은 단테는 고국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반항의 대가는 그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피렌체 공문서 보관청에는 언제 어디서건 단테를 체포하면 산 채로 태워 죽일 것을 명하는 살벌한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는 이후 5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을 떠돌며 살았다. 비록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의 보호와 후원에 기대어 살았지만 고향을 떠난 망명자의 심정은 늘 불안하고 비참했다.
 
 
이명옥의 <로망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