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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나라 둘러보기/전라도

조선 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구례 운조루 고택~

 

운조루 고택이 있는 오미리 마을 주변의 산책로를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섬진강 대로변의 곡전재를 지나서 곡전재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운조루 고택을 만날 수 있다.

 

 

 

 

 

 

 

운조루 대문 앞으로는 마당은 없고 바로 긴 연못이 가로 놓여 있고 연지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삼신산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연지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조경관이었던 천원지방 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현한 것으로, 주변으로

 

각종 연화 蓮花를 비롯한 화초를 심었고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연지는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 五峰山, 삼태봉 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고택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이다.

 

 

 

 

 

 

 

대문은 1776년에 세워졌지만 얼마 되지 않은 1804년에 한 번 중수되었는데, 창건주 유이주 사후 홍살문이 내려져서

 

중수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대문은 맞배의 솟을대문이지만 최초 모습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보면 합각지붕이었고,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솟을대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대문에 '호랑이 머리뼈'를 걸어 두었지만 도난을 맞은 이후 '말 머리뼈'로 대신하고 있다고 하고~

 

 

 

대문과 연결되어 있는 행랑채에서 대문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문도 있다.

 

 

 

 

 

 

 

대문과 연결되어 있는 행랑채 모습이다.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의 외행랑은 동 행랑과 서 행랑으로 불렀고, 행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은 헛간과 창고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고 한다. 

 

 

솟을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 안주인이 출입했다고 하고, 건축 당시 이 행낭은 대문을 중심으로 각각 12칸이었으나

 

지금은 동쪽이 11칸, 서쪽이 7칸만 남아있다고 한다.

 

 

 

행랑채에서 바라본 사랑채 모습이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나오고 마당 뒤의 사랑채와 바로 마주하게 되는데, 좌측에 놓인 것이 큰 사랑채 外舍이고

 

우측에 놓인 것이 중간사랑채 中外舍라고 한다.

 


마당으로 가장 돌출되어 있는 이 중간 사랑채는 통상 귀래정 歸來亭이라 불렀고, 이 집주인의 아들이 기거했던 곳이며 그

 

아래로 손주 등이 사는 작은사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남아있는 초석에서 그 흔적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평면구성을 살펴보면 큰사랑채는 남측채 6칸(중문간 포함)과 북측채 2칸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ㅗ'자형이고, 남측채의

 

동쪽으로 안채의 중문간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외주문 外廚門이라 했으며 사랑방은 2칸으로 수분실장방 隨分室長房이라 했는데, 수분은 창건주 유이주의 아들

 

유덕호의 호라고 한다.

 

 

 

 

 

 

 

측면에서 바라본 운조루 큰사랑채 모습이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유이주 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고, 큰 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

 

(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집을 지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 칸집이었다고 하고~

 

 

 

사랑채 사이의 중간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 본다.

 

 

 

 

 

 

 

 

 

 

 

안채는 큰사랑채와 중간 사랑채 사이에 있는 중문간을 통하여 진입할 수 있는데, 여성들과 아이들이 기거했던 공간이며


지금도 살림채로 사용중이라고 한다.

 

 

안마당보다 높게 기단을 쌓은 'ㄷ'자형 평면이 안채의 기본형이나 형태상 귀래정의 오른쪽으로 붙은 남 행랑이 안채 전면에

 

있어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방향으로 보자면 북측채에 해당하고, 좌우측에 안마당과 같은 높이로 방과 부엌, 광이 있는 서측채와 동측채를 두었다.

 

남측으로는 단을 두고 높이를 낮추어 곡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서측채에 있는 부엌에 들어서면 남측으로 큰사랑 뒷마당을 통하여 큰 사랑에 계신 손님의 수발을 들고 음식을 나를 수 있는

 

문이 있으며, 북측에는 큰사랑 뒷마당 담장 뒤로 부엌일을 할 수 있도록 우물이 있는 부엌 마당을 두었다.

 

 

 

 

 

 

 

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장독대 모습이다.

 

 

안채 뒤뜰로 돌아가 본다.

 

 

 

 

 

 

 

담장으로 구획된 공간에 협문들이 설치되어 있다.

 

 

각 공간을 구획하는 담장이 운치있고 멋스럽다.

 

 

 

 

 

 

 

사당으로 이어지는 협문이다.

 

사당의 초창 때 모습은 정면이 분명하게 2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지금 현재는 정면은 1칸이고 측면은 툇마루가

 

있어서 2칸인 격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안채 동측채의 부엌을 지나 들어서면 안채와 사당을 구분하는 담이 나오고 담 뒤로 사당과 협문이 위치하고 있고

 

남쪽의 협문을 지나 사당으로 출입하게 된다고 한다.

 

원래는 사당 앞으로 신문이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자면 1869년 노후하여 스스로 넘어졌다고 한다.

 

사당은 여전히 신주를 모시고 기제사와 명절 차사를 모시고 있다고 하고~

 

 

 

 

 

 

 

안채 뒤의 사당과 연결되는 공간들 모습이다.

 

 

 

 

 

 

 

 

담장 너머의 사당 모습이다.

 

 

 

 

 

 

 

안채 뒤 모습이다.

 

 

안채를 나서서 사랑채로 향한다.

 

 

 

 

 

 

 

사랑채 누마루 모습이다.

 

 

사랑방 서쪽에는 대청 2칸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이고, 운조루는 이 집의 택호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새들은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운조루 모습이다.

 

 

서쪽의 누마루는 족한정이라 부르며, 한가롭게 머문다는 의미로 유이주의 대손인 유억 柳億의 호라고 한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북쪽으로 빠져 올라간 익랑을 이긍재라고 불렀고, 유덕양의 일기 <시언> 에서는 이를

 

서실책방 書室冊房이라고 하였으며, 이곳에서 공부하여 여러 사람이 관직으로 나갔다고 한다.

 

 

 

 

 

 

 

바깥 마당에서 본 운조루 모습이다.

 

 

 

 

 

 

 

대문 옆에 세워놓은 타인능해다.

 

 

 

 

 

 

 

운조루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놓여 있는 원래의 타인능해 모습이다.

 

 

운조루에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 있는데, 이 뒤주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그 문구가 바로 '他人能解'이다.

 

타인능해, 즉 "누구나 쌀뒤주를 열 수 있다."

 

 

원통형의 이 뒤주에는 세 가마니의 쌀을 담을 수 있고, 마을의 굶주리는 모든 이를 위해 이 뒤주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창건주 류이주 님은 한 달에 한 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했다고 하며, 운조루는 대략 이백여 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시기에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대개는 매년 삼십여 가마의 쌀을 양식 없는 이웃들을 위해 내어 놓았다고 한다.

 

 

쌀을 얻기 위해 운조루를 방문하는 일은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고, 혹여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주는 중간 사랑채와 큰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헛간에 두었고, 주인들과 쉽게 마주칠 가능성이 낮은 곳에

 

뒤주를 두고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면 이 뒤주의 사용을 자제했던 모양으로 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들을 위해 운조루의 뒤주를 양보했고

 

오히려 근면하게 노동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자극제이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뒤주를 개방한 운조루의 마음과 뒤주를 여는 일을 자제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동일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것이다.

 

 

 

 

 

 

 

대문 밖 연지의 자그마한 섬에 심어 놓은 소나무다.

 

 

밖에서 본 운조루 모습이다.

 

 

 

 

 

 

 

오미리 마을의 정자를 지나서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