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국립 미술관 샵에서~
오슬로 국립 미술관은 노르웨이 최대의 미술관으로 1836년에 개관했다는데
피카소 르노아르 세잔 마네 모딜리아니 드가 뭉크 등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노르웨이가 배출한 세계적인 화가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인데
이곳에는 대표작 절규를 포함해 뭉크의 작품이 60여 점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과 19~20세기 덴마크 핀란드 화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는데
미술관의 주요 전시관은 사춘기 절규 등 58점의 뭉크 작품을 전시한 뭉크관이다.
국립 미술관은 오슬로의 가장 번화하고 대표적인 거리라는 카를 요한 거리에 접해 있는
오슬로 대학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다.
덕분에 시청사를 출발한 차량에서 오슬로의 중심가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노르웨이 국회의사당
차창으로 고풍스럽고 멋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노르웨이 국회의사당이라는데 달리는 차량 안에서 담은 것이라 중앙부 모습 밖에 담질 못했다~~ㅠ
가로수가 즐비한 카를 요한 거리에서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면서
잠시나마 길가의 많은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이 거리와의 마지막 대면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오슬로 국립 미술관 Oslo National Gallery
카를 요한 거리에서 한 블럭 안쪽에 위치한 국립 미술관 주변은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었다.
박물관 입구~
여느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조금 큰 가방 등은 락카에 보관시키고
간단한 차림으로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들어서자 계단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나신으로 제일 먼저 우릴 맞이한다~
이 국립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도 한결같이 유명한 거장들의 것이라
꼭 누구의 작품을 보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보이는대로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 등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사진을 담아봤는데
미술에 대해서는 워낙 문외한인지라 담긴 사진들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가 없다~~ㅋ
조금 아쉬운 부분인데 포스팅하면서 인터넷 등에서 작가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작품들에 한해
작가와 작품명을 기재해 보았다~~
밝고 화사한 모습의 풍경들이 아름다워 몇 점 담아봤다.
북유럽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대표하는 것 같아서~~
노르웨이 화가 Arne Ekeland의 The Last Shots 라는 작품
위의 그림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한참 바라보다 담아본 사진이고
아래의 그림들은 여지껏 보아왔던 누드 그림들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들이라 담아봤다~~ㅎ
Auguste Rodin 의 lris, Messenger of the Gods
벽면에 그림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홀 중앙부에
무척 특이한 조각상이 보여 담아 봤는데 로댕의 작품이란다.
이 방에 로댕의 대표작이랄수 있는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작품은 생략하고~~ㅋ
Edvard Munch의 그림인 Rue Lafayette
뭉크의 서명이 있어서 작가명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고~~
Pablo Picasso 의 Nature morte
August Macke 의 Rococo
Rolf Nesch 의 on the beach
Christian Krohg 의 Struggle for Survival 생존을 위한 투쟁
계단실에 걸려 있는 그림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현재 오슬로의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 카를 요한 거리의 한 상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배급해 주는 일상을 담은 모습이라는데
앞쪽의 어른들에게 밀려 맨 뒤에서 추위에 떨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런 과거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가
현재는 세계 제1의 부국이자 복지국가로 거론되는데
이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도 많다.
오랫동안 덴마크 스웨덴과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유럽의 변방 국가가
현재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1960년 이후의 석유 생산 덕분일 것이다.
노르웨이는 2012년 9월 현재 기준으로 세계 제13위의 석유 생산국이자 5위의 수출국으로
천연가스는 세계 5위의 생산국이고 수출은 3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며
석유와 가스로 인한 수입액은 노르웨이 국내총생산의 25%, 국가 재정수입의 33%를 차지한다고 한다.
적은 인구 밀도에 엄청난 양의 석유 생산과 그 관련 사업으로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dvard Munch 의 The Scream 절규
국립 미술관 내의 사진 촬영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인 것에 반해
유독 촬영을 철저히 금하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뭉크의 방이다~
뭉크의 절규가 워낙 유명한 작품이어서 전에 몇번 본 적은 있지만
이곳 국립 미술관 내에서도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취급되고
이 작품을 보러 일부러 국립 미술관을 찾을 정도라고 하니 부쩍 호기심이 동한다.
그래서 뭉크의 대표작 몇 점과 그에 관한 내용들을 인터넷의 백과사전 등에서 발췌해 봤다.
공부하는 셈치고~~
다음은 부분적으로 발췌해 본 내용들인데~~
뭉크는 1893년부터 <생의 프리즈>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의 프리즈>는 삶과 사랑과 죽음에 관한 시다.
뭉크는 이 연작을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려 했으며,
인간 감정의 모든 국면을 형상화시키고자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 《절규》이다.
《절규》는 뭉크가 ‘생의 공포’라고 부르던 것을 표현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검푸른 해안선, 동요하는 감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의 병치,
그리고 극도의 불안감으로 온몸을 떨며 절규하는 한 남자,
이 남자의 절규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고통에 대한 울부짖음이고, 뭉크는 이를 입 밖으로 표출시켰다.
뭉크는 이 이미지를 다양한 매체로 50점 가량 제작했다.
Edvard Munch 의 Madonna 마돈나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고 고백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마돈나》는 여성과 죽음
특히 섹슈얼리티와 죽음을 연관시키고자 하였던 뭉크의 의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걸작이다.
서양미술사의 영원한 '마돈나'는 마리아였다.
그는 순종과 믿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순결과 성스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뭉크는 성(性)과 사랑에 사로잡힌 죽음의 여신으로 마돈나를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마돈나》에서 성스러운 제목에 어울릴 만한 것은 머리 위에 띠처럼 그려진 붉은 후광 뿐이다.
그의 마돈나는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사악한 요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모습은 유혹적이지만 반면 위협적이다.
작품 속에서 성적 희열에 잠긴 에로틱한 누드는 꿈결 같은 공간을 떠돌고,
소용돌이 치듯 그녀 주변을 휘감는 검은 붓질은 폭풍 같은 내면을 드러낸다.
화면의 왼쪽 하단에는 해골처럼 보이기도 하고, 태아 같기도 한 기묘한 작은 형상이 그려졌다.
이 형상은 두려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
그 주변으로는 정자를 닮은 형태들이 그림의 가장자리를 떠다닌다.
이 작품은 1893년부터 1894년에 걸쳐 유채화로 완성되었고,
다시 1895년부터 1902년에 걸쳐 석판화로 변주되었다.
이 둘의 차이는 유채화에는 화면 테두리가 없고, 석판화에는 테두리가 있다는 점이다.
붉은색 테두리에는 이와 같이 정충이 흘러가고 해골 같은 모습의 작은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즉, 뭉크는 이 그림을 석판화로 옮길 때 자신의 의도를 조금 더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성애의 절정을 그리면서 동시에 이러한 관능적인 사랑이 죽음과 관계됨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이 그림의 테두리가 암시하듯 순환하고 사슬로 연결된다.
뭉크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의 입술은 잘 익은 과일처럼 분홍색을 띠고 있다.
쾌락의 고통 때문인지 당신은 살짝 입술을 벌리고 시체처럼 미소 짓는다.
이 순간 생명은 죽음과 악수하고 지나간 세대와 미래 세대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다."
Edvard Munch (1863~1944)
뭉크의 그림 해설 등을 보다보니 그의 성장 과정과 삶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어
간략히 발췌해 봤다~
에드바르트 뭉크는 노르웨이 뢰텐(현재는 루티니아)에서
의사 크리스티안 뭉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슬로에서 성장했다.
5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 라울라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오랜 병상에 있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그가 14살 때,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이 가정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과묵하고 엄격했던 아버지는 더욱 말이 없어졌으며,
계속되는 가족의 불화와 서서히 찾아오는 빈곤이 한 집안의 단란함을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어두운 가정의 분위기와 갑자기 들이닥쳐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 버린,
질병과 죽음에 대한 예측할 수 없는 공포는 뭉크의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뭉크는 자신의 고통스런 유년 시절에 대해
"나의 요람을 지켜보고 있던 것은 질병과 광기와 죽음이라는 검은옷의 천사였다.
그들은 그 후에도 계속 나의 생활에 달라붙어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이와같은 어두운 운명은 그대로 그의 예술을 길러내는 힘이 되었다.
뭉크의 파리 유학은 1885년과 1889년부터 3년간, 두차례에 걸쳐 이루어 졌다.
첫 번째는 4주일간의 단기간으로 인상파에 마음이 끌렸으나 만족하지 못했고,
두 번째 유학에서 고호, 고갱, 로트렉 등의 반 인상파적이며 세기말적인 작품에 공감하여..
"호흡하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을 그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일생동안 계속하여 그린 결정적 주제였던 <생명의 프리이즈>연작을 구상하게 되었다.
Edvard Munch 의 The Day After 그날 이후
위의 내용들은 두산백과 등에서 빌려온 내용들인데
알면 알수록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ㅎ
어렵기만한 작품들을 뒤로하고 박물관을 나선다~
박물관 입구 모습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출구 부분에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
이곳의 다양한 상품들 중에서도 유독 뭉크와 연관있는 상품들에 눈길이 쏠린다.
또한 그만큼 뭉크에 관한 상품들이 많은 탓이기도 하고~~
밖에서 본 박물관 입구~
박물관 전면에는 작은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조각상 몇 점이 자리하고 있다.
궁금증에 다가가봤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하단의 작가명을 보니 비겔란이다~
조각상을 둘러보며 일행을 기다리고~
카를 요한 거리 방면의 모습~
일행이 모두 모이자 이곳에서 첫 대면한 현지 가이드가 출발을 서두른다.
시간이 지체되면 오슬로를 빠져 나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나~
카를 요한 거리를 돌아보는 것은 어떡하고~~?
비겔란 조각 공원에서의 지체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최고의 가이드라고 자부하는 이 잘난? 가이드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이후의 여행기를 정리하는 동안 최소한 한두번 이상은 이 잘난? 가이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악연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앞뒤가 맞지 않고 거슬리는 언행 때문에~~ㅠ
오슬로를 빠져 나오는 차창으로 많은 요트들이 보인다~
오슬로를 벗어나자 도로는 급격히 좁아지는데
차창을 스치는 풍광들은 아름답기만하다~
게일로로 가는 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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